보쿠라노하타 독후감 최우수상입니다
  글쓴이 : 빵공장     날짜 : 18-09-03 13:43     조회 : 48    
<저항의 용기와 연대로 깃발을 들다>
                                                                                                                            이정은

나는 ‘존재’에 대하여 매달려 본 적이 있던가.
이 책을 만난 이 후로 줄곧 떠나지 않은 물음이었다. 일상의 크고 작은 많은 행위에서 의미를 찾고 생각이나 감상하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도 나는 내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내가 어떠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가 의식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상념에 빠진 채 애쓰고 만든 여유 속에서나 던져 볼 수 있을 법한 철학적 질문이라 할까? 그렇게 석철과 영순의 교환노트가 들려준 ‘존재의 괴이함’이 나에게 철저히 각인시킨 ‘존재’에 대한 의문. 30여년을 살면서 나 스스로에게 혹은 주변사람들에게 치열하게 묻고 답할 필요가 없었고 그것의 부재는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재일조선인의 존재를 알았던 때, 가슴이 저리고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뒤엉켜 마음이 엉망이 되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흐릿해진 ‘존재’는 동포들이 나고 자란 땅에서도 이미 수 없이 지워지고 침묵된 ‘존재’였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부당함에 저항하며 함께 혹은 각자의 방법으로 존엄을 지켜오며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투쟁하며 살아가고 있다.
2000년대를 살고 있는 또 다른 석철, 태일, 영순, 수일 등 모두에게 ‘존재의 괴이함’은 물론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자기규명의 화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와 저마다의 답을 찾고자 하는 갈망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서러움과 늘 함께였을 것이다. 그 헤아릴 수 없는 서글픔이자 애달픈 모두는 방식은 다르지만 시대로부터 각자의 존재에 대한 질문에 답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자신의 선택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음에 괴롭고도 집요하며 잔인하다고 느꼈다. 고향을 가져보지 못한 이국 태생의 조선인에게 ‘왜 조선인이어야만 하나’라는 고통스러운 물음.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재일 민족교육의 역사를 통틀어 암흑기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어둠을 살아 온 사람들이 말한다. “조국”과 “고향”. 이 두 단어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냐고. 그리고 무자비하게 외면당해왔다고 말하는 석철에게 나 또한 고백하며 읊조렸다. 사실은 나도 너를, 너희 친구들을, 동포들을, 재일조선인을 잘 모르고 있었다고 말이다.

「보쿠라노 하타」가 생생한 목소리로 재일조선인의 이야기에 담은 석철과 태일, 영순, 남식, 카지 선생님 등과 그들의 가족, 나아가 당대의 동포들이 살았던 일상 뿐 아니라 그 시대를 대하는 각자의 삶의 방식, 과제를 실천하는 모습은 특히 인상 깊었다. 고향이 생생하게 기억나지 않는 것에 괴롭던 석철이가 자기 안의 질문을 통하여 존재의 가능성과 그 의미를 발판으로 삼아 조국에 회귀한다는 것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그러했고, 조국에 이바지 한다면 자기존엄성이 실현될 것이라 믿는 것이 그러했다. 이는 해방조국과 미래를 준비하는 모두의 다짐이고 길잡이가 되었다. 조선말을 모르는데 조선인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 하냐고 카지 선생님에게 날카롭게 일침을 날린 승옥이, 또 그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말 학습을 자신의 과제로 삼고 열심히 매진하여 일본인 교사를 위한 조선어입문 책을 저술한 카지 선생님의 마음과 실천. 누구보다도 유창한 조선말을 하고 조선인다움을 풍기던 영희의 커밍아웃. 그리고 충격적인 그 고백에 말없이 손을 잡거나 어깨를 껴안고 위로의 눈빛을 보내는 것으로 답한 동무들. 강건하고 주도적인 태일이가 운동의 과오로 그 당위성과 말순에 대한 사랑을 동시에 상실했을 때 방황 속에서 마저 빛나던 순수와 열정. 조선과 일본의 선린우호를 강조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마음을 가질 것을 당부한 세계사 선생님 등 「보쿠라노 하타」의 한 명 한 명은 시대가 짓누른 고통 속에 서로를 붙들고 성장한 역사 그 자체이다. 그러한 재일조선인의 역사는 삶과 투쟁, 고난과 영광의 모든 순간을 담고서 ‘우리들의 기발’로 펄럭였다. 민족학교와 동포사회 그리고 담장 밖을 넘어 일본사회와 쓰린 세상 어디에나 저 마다의 신념으로 무리를 이루어 빛내었다.

4월의 그 바다가 있던 잔인한 2014년.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찼던 그 해, 내 인생에서 어느 해 보다 잊지 못하는 또 다른 여러 이유들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10년의 연애 끝에 자신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하여 함께 고민하고 그 선택을 존중 할 수 있겠다고 믿으며 결혼을 했고, 정말 우연한 기회에 10년 전 쯤 봤던 영화 ‘우리학교’를 다시 본 날의 기억 때문이다. 이미 10년 전 처음 조선학교에 대하여 알았을 때 받은 그 충격이 생생하게 되살아났고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궁금증에 대응했다.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_몽당연필이라는 단체를 알았고 히로시마 소풍콘서트를 통하여 난생처음 조선학교를 갈 수 있었다. 그 곳에서 만난 우리학교, 우리 아이들. 그리고 그 만남이 나에게 주었던 마음 속 깊은 울림은 나의 일상을 바꾸었다. 잘 익은 김치를 먹을 때도 떠오르는 이가 있고, 차별이 일상화 된 일본정부에 맞서 ‘고교무상화 실현’을 위한 투쟁에 마음을 함께 했다. 이 후 몽당연필과 북녘어린이영양빵공장 사업본부가 공동주최로 한 청년 재일동포들과의 교류 사업에 참여하였는데 이 경험은 완전히 상상을 뛰어 넘었다. 인천으로 돌아온 내내 며칠을 울고불고 지내며 깊은 우울함과 허탈함이 온 마음을 뒤죽박죽 헤집고 괴롭혔던 것이다. 무엇이었을까? 어떤 것이 이유인지 찾고 싶었고 그 괴로움과 마주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다고 외쳤던 나의 가슴에 무언가 결여되어 있었으며 그것이 바로 내가 만나고 온 실체하는 사람이고, 곧 역사이자 시대적 사명을 관통하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 비어있음을 깨달았을 때, 나의 통일에 대한 염원과 간절한 바람에 미처 담지 못한 잃어버린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을 때, 부끄러웠고 또 괴로웠다. 솔직히 남과 북, 북과 남은 너무나 당연하고 절실했지만 재일조선인의 존재를 알고 경험하기 전에 동포들의 존재는 심장이 뛴 다기 보다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언어였던 것이다. 심장이 맞닿도록 껴안고 얼굴 부비며 함께 노래하고 밤새 이야기 나눈 나의 동무들! 그리고 이들과 민족학교의 존재는 70여년을 지켜 온 재일 민족교육 역사의 증거이고 이어온 혼이며 끈질기게 지켜 오고자 했던 인간의 존엄이기에 다시금 숙연하지 않을 수 없다. 급변하는 정세 속에 나는 어떤 것에 저항하며 살아야 하는가? 또 무엇을 껴안아야 하는가? 내 안에 나태함과 타협하지 말고, 알고 마주한 것에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하고 나아가야 하는가? 시대의 요구와 사명이라는 거창함을 내려두고 적어도 나의 양심과 용기에 기대어 마음을 다듬어본다. 펄럭이는 깃발을 상상하며.